옛 사람들은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세운이가 많았다.
혹은 江湖의 경치를 취하고
혹은 山林의 즐거움을 취한 것이니
豊樂亭과 醉翁亭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아니하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아니하고 이름을 숨길 의도로
매양 그윽하고 조용한 곳을 택 하였다.
마침 옥산 아래를지나다가 보니 낮으막한 산 기슭 얕으막한 언덕이
들판 가로 흐릿하게 뻗힌 형국인데
동으로 부터 뻗어와 북쪽으로 솟았다.
거의 태초이래 열리지 않은 사람들이 버린 땅 이었으니
참으로 외진 곳이 였다.
진실로 夏山(창녕)의 한 구석지고 동 떨어진 곳 이었다.
북으로는 龍湖가 터져있고
남으로는 복령이 동남쪽을 막고 있으니 참으로 외진 곳 이었다.
나도 모르게 열 걸음에 아홉번 이나 뒤 돌아 보았다.
나그네도 다니지 아니하여
혹 산에 오르는 사람은 나뭇꾼이요
혹 물에 가는 사람은 고기 잡는이 였다.
외진 곳을 택 한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서 찾겠는가
가운데 평평하고 작은 둔덕이 있는데
그곳에 초가 두어칸을 지어 편액을 "玉湖亭"이라 하고 여기서 살았다.
세속의 근심을 잊기에 충분하여 스스로 考盤의 즐거움으로 삼았으나
옛 친구는 저절로 드물어지고
친척은 서로 멀어지니 종종 서글픈 마음을 금하기 어려웠다.
그럴 때면 산에 올라 땔감을 해서 내려오면 어린 아들은 대문에서 기다리고
배를 타고 龍湖에 들어가 고기를 잡아 돌아오면 늙은 아내는 골목에서 맞아 주니
또한 생업이 자급자족 됨이 즐거운 일 이엿다.
이곳에는 모양이 기괴한 암석이나 진기한 소나무, 특이한 꽃이나 기이한 풀은 없고
오직 한가지 짙 푸른 숲과 한 줄기 흐르는 냇물은 절로 생겨 있으니
山林의 즐거움이 그만하면 괜찮은 셈이다.
일찌기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읽었더니
그때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여 연명에 비겼다.
아하! 연명은 시상(柴桑)의 한 은둔한 선비였고
나는 옥산의 한 버림받은 遺民이니 각자의 所懷를 궁구 해보면
옛날과 지금이라는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의미는 서로 유사하다.
고기잡이와 땔감 하기를 생업으로 삼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세간살이로 삼으니
진실로 즐거워 할만하다.
이리하여 이곳에에서 거처하며 생활을 하니 참으로 옥산 ,
이 궁벽한 곳이 내 한집의 소유로 되었다.
여기서 편안히 지내며 나의 여생을 마칠까 한다.
1590년대 후반 쯤
15 代 祖(入鄕祖)考께서 쓰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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