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身正心

儒 . 佛 . 仙 理惑問答

옥호정 2007. 5. 21. 14:04

 이 글은 탄허 스님의 번역이다 . 옛 사람들의 思考의 一端을 엿 보므로써

물질치중의 현대일상에 고인들의 신선한 달변을 경청하며 느끼는 울림을

여럿이 더불어 나누기 위하여 간략하게 발췌 약술 한다.

 

한 儒林 의 선비와 牟子(아마도 불경에 통달 한 인사 인듯) 間의 논변이다.

 

 

問(儒士)

 

대장경을 보고 모자에게 묻기를

지극한 실상은 浮華가 없고 지극한 말은 수식이 없나니

말이 干約하되 지극한 것은 빛나고

일이 적되 통달 한것은 밝은지라

고로 주옥은 적어나 귀하고

자갈은 많아서 賤하나니 성인이 七經(詩,書,易,春秋, 예기, 효경, 논어)

지어 근본이 三萬言에 불과 해도 衆事가 갖추어 졌는데

佛은 어찌 經을 萬으로써 헤아리고

말을 億으로 세는가?

 

答(牟子)

 

강과 바다가 길에 고인 물과 다른 것은 깊고 넓은 까닭이요

五岳이 丘陵과 다른 것은 그 높고 큰 까닭이이다

낮은 언덕의 높은 곳에는 절름바리 양도 그 꼭대기를 능멸하고

시냇물의 깊은 곳에는 어린아이도 모욕을 하거니와

천리준마는 울타리안에 處하지 않고 배를 삼키는 물고기는 시냇물에 놀지 않는다.

세치 조개를 쪼개서 밝은달 (明月珠)을 구하고

가시덤불에서 봉황의 새끼를 구하면 반드시 얻기 어렵다.

이것은 작은것이 큰것을 능가 할 수 없음이다.

 

問(儒士)

 

불경이 多衆하니 그 요지를 얻어 나머지를 버려서 다만

그 實을 說하고 華를 除할 지라

 

答(牟子)

 

日月이 함께 밝아도 각기 그 비침이 다르고

舟車가 함께 타는 것이라도 각기 그 길이 다르다.

 

問(儒士)

 

불도가 지극히 높고 지극히 크거늘 어찌 성현이 닦지 않았으며

자네가 詩書를 탐독하고 에악을 즐거워 하며 어찌 또 불도를 좋아 하는가

 

答(牟子)

 

書不必孔丘之言이요(공자의 말만 꼭 글일 필요는 없다)

藥不必扁鵲之方이랴(편작의 처방만이 꼭 약이되는것이 아니다)

合義者從이요(義에 맞으면 따르고)

愈病者良이다.(병이 치유되는것이 좋은 약이다)

군자는 널리 衆善을 取하여 그 몸을 돕나니라

 

問(儒士)

 

沙門은 어찌 처자를 버리고 재화를 버려서 고행이 금수와 다르지 않은고

 

答(牟子)

 

처자와 재물은 세상의 잉여물이요

몸을 청정히 하여 하는게 없음은 도의 妙함이라

 

問(儒士)

 

古人이 이르되 知者不言하고

大辯은 若訥이라 하였는데

사문은 지극한 道가 있으되 능히 行치 못하거니

어찌 다시 시비를 말 하며 曲直을 논 하랴

 

答(牟子)

 

옛 성인이 어찌 말 하지 않았느냐

만일 그 말이 없을진데 五千을 어찌 述 햇으리오

만일 알고 말하지 않음은 옳거니와

能히 알지 못하고 또 능히 말 하지 못 하면 愚人이라

故로

能言不能行(능히 말하고 능히 행치 못함)은 國家의 師요

能行不能言(능히 행 하고 능히 말 하지 못함)은 국가의 用이요

能行能言(능히 行하고 능히 말 함)은 국가의 보물이라

이 三品은 각각 베풀바가 있다.

 

問(儒士)

 

사문은 辯達만 배우고 言論만 닦아서 어찌 다시 性情을 다스릴 수 있나?

 

答(牟子)

 

말과 담론이 각 기 때가 있나니

공자가 이르기를

가히 더불어 말할데 더불어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는 것이요

가히 더불어 말 하지 않을데 말 ㅎ면 말을 잃은 것이라

고로 愚智가 스스로 뜻에 있고

담론이 각각 때에 있으니 어찌 언론에 當해 行치 않으랴

내가 말을 좋아 함이 아니라

물으니 대답 하는것이라  鐘敲가 어찌 스스로 우는가

북채를 더한 후에 소리가 나니라

 

 

 

 

 

緇門에서 略記하여 옮김

 

치문(緇門) 이라는 책은

승려가 되기위하여

배우는 글인데

儒家의 少學과 같은 단계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