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身正心

[스크랩]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옥호정 2007. 7. 20. 16:22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달 봉(達 峰) (지경진) 


 화엄경에 이르기를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이라고 했다. 만약 중생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들의 일체(一切) 즉 十二處〔(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와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의 깨달음의 진실을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근본 성질을 꿰뚫어 볼지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것이 오직 마음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이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과연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중생은 眼, 耳, 鼻, 舌, 身, 意의 六根이 色, 聲, 香, 味, 觸, 法의 六境에 집착해서 만들어낸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의 六識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다시 七識(잠재의식, 말라식, 자의식)을 만들어 내어 이것을 자기라고 느끼며, 이것이 다시 자기의 근원적 뿌리인 八識(아뢰야식, 무의식, 종자식, 백정식, 여래장식, 업식)에 저장되어 이 八識이 끊임없이 六度를 윤회를 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낸 6식, 7식, 8식의 세계를 우리는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다. 이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나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어서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 있는 無常한 것으로 집착하거나 애착할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이것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양 이 마음에 집착해서 喜怒哀樂의 감정을 내어서 이것에 이끌리어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실재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顚倒夢想된 생각으로 살아가는 한 중생은 마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에 이끌리어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서양 철학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세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실제로 주관적인 것의 상대인 객관적 器世界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객관적 器世界를 정복하고 개발해서 인간의 삶에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주관도 객관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無常한 것이며 空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世間이라는 것은 이른바 “안(眼), 색(色), 안식(眼識), 안촉(眼觸), 안촉(眼觸)으로 인(因)하여 생기는 느낌(受) 즉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과 이(耳), 비(鼻), 설(舌), 신(身)과 의(意), 법(法), 의식(意識), 의촉(意觸), 의촉(意觸)으로 인(因)하여 생기는 느낌(受) 즉,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세간(世間)”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말하는 이 우주 만상과 우리의 의식 세계를 구성한 모든 것들은 인연(因緣)따라 일어났음으로 당연히 인연(因緣)따라 사라지는 위태롭고 약하며 언젠가는 滅하는 것임을 설명하신다. 안(眼)은 공(空)이요, 恒常되어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法도 공(空)이며, <내 것>이란 것도 공(空)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그 성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혹은 색(色), 안식(眼識), 안촉(眼觸), 안촉(眼觸)으로 생기는 느낌(受) 즉,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 역시 공(空)이며, 恒常되어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空)이며, <내 것>이란 것도 공(空)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그 성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혹은 耳,鼻,舌,身,意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으며. 이것을 이름하여 공(空)인 세간(世間)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보아 六根도 空한 것이며, 이것의 객체인 六識도 空한 것이며 六根이 六境에 집착해 만들어낸 六識도 空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主觀도 空하며, 客觀도 空하며, 우리가 인식하는 世間이라는 것은 일체가 마음으로 만들어낸 虛想의 세계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에 대해 唯識學에서는 三無自性論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들고 있다. 이것은 虛妄分別相이며, 相無性이며, 無相(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공간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가지가지의 緣으로 생긴 실체가 없는 존재를 實我, 實法이라고 잘못 집착하는 중생의 미혹한 마음(能遍計)과 그 心識의 대상인 境(所遍計)과 이 識과 境에 대해서 心外에 실재한다고 그릇되게 인식하여 實有로 집착하는 모습을 遍計所執이라고 말한다. 만유의 모습은 중생의 미혹한 마음으로 思量分別한 心量에 의해서 나타난 相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당정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인식하는 참다운 경지인 佛地에서는 실제하지 않는 情有理無의 헛것이고, 본래는 실체가 없는 體性都無이다.
 둘째로,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들고 있다. 이것은 因緣相이며, 生無性이며, 無常(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시간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依他 곧 모든 존재가 갖가지 인연의 화합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인연이 합하면 생기고 인연을 여의면 없어지는 꼭두각시와 같아서 고정적인 영원불변의 실재가 아니므로 如幻假有 또는 假有實無라 한다. 영원불변의 실재는 진리를 깨달은 지혜에 의해서만 알게 될 뿐 迷情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理有情無라 한다.
여기에 染分依他起性과 淨分依他起性이 있는데 染分은 有漏의 모든 것을 말하고 淨分은 無漏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단 染分의 依他는 번뇌를 여의고 있다는 점에서 圓成實性에 포함시키며 染分依他만을 依他起性으로 보고 있다.
 셋째로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들고 있다. 이것은 第一義相(자기 자신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이며, 勝義無性이라고 할 수 있다.
 依他起性의 진실한 體인 眞如를 말하는 것으로 온갖 것에 원만하게 두루하여 不生不滅하고 그 體性은 거짓이 아닌 진실한 것이므로 圓成實性이라고 한다. 圓成實性의 眞如는 모든 相을 여의어 無想이고 모든 것의 本體로서 진실하기 때문에 眞空妙有이며 진리를 깨달은 지혜로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理有情無이다.
 眞如로서의 勝義性을 지니고 있지만 眞如가 그 자체로서 自性이 없는 無自性이므로 勝義無自性이라 한다.
 일체의 모든 法界 즉 世間이라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의 세계이며, 이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집착하거나 애착할 것이 못된다는 一切唯心造의 사상은 진여를 드러내는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마음의 虛妄性을 깨달았을 때만이 마음의 허망한 세계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진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이라는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正見으로 사물의 실제의 모습을 제대로 보아 般若의 空性을 드러내고, 이것을 바탕으로 보리의 方便門으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보살의 수행의 증과를 얻어 부처를 이루어 영원한 安樂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글쓴이 : 지경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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